기영 형제의 글을 찬찬히 읽으며, 감동이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솔직히 나누는 용기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기영 형제를 기다려주시고 끝끝내 복음의 반응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동이 다는 아니예요.
기영 형제의 고백이 단지 기영 형제만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연약함에 대한 종류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때 저 자신의 죄인됨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깨달아 뒹굴던 것이 생각납니다.
저에게는 그 계기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교리강좌 시리즈>를 읽은 것입니다. 진성 형에게 양육을 받을 때 여름방학 내내 복음주의의 교리를 잘 정리해놓은 그 책을 읽으며, 내가 무엇을 믿는지 마침내 발견을 했었어요. 내가 죄인이란 것을 가슴 깊이 인정하게 되었어요. 아니, ‘죄인’이란 단어는 교회 안에서 너무 고상한 표현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나는 이정도로 겸손하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예요.” 라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요.
그때의 저는 죄인 정도가 아닌 ‘쓰레기’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아무런 회생의 가능성도 없는 쓰레기. 남들이 볼 때는 신앙있고 점잖은 리더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어두움이 가득한 쓰레기구나. 가슴 깊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비하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것이 예수그리스도를 걷어낸 상태의 사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저는 ‘쓰레기’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마침내 복음답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아무런 가능성없는 쓰레기이니, 붙잡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0점짜리 상태이니, 예수님이 100점짜리 존귀한 분이 되었던거지요. 그렇게 복음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희미해졌구나 싶네요.
첫 번째 계기는, 얼마 전 경인교대 캠퍼스 PLTC에 주재권 강의를 하러 간 것입니다.
2학년 이제 갖 양육리더로 설 지체들에게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주재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삶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삶으로 웅변하지 않는다면, 캠퍼스맨들에게 해 준 말들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두 번째 계기는, 기영 형제가 용기있게 나누어 준 위의 글입니다.
기영 형제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에게도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라고.
하나님 외에 위로와 쾌감을 찾던 것을 버리라고.
성령님께 그 곳을 열어드리라고.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 이전에, 내 영혼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로 채우라고.
그리고 물으시는 듯 합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기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