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E-BOOK
P. 19

교육과 양육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 속에
             서 비전 2000은 일부 실패감을 갖는 분위
             기였어요. 그때, 비전위원은 교육이라는
             부분을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모였던
             사람들었어요. 위원회의 성격이 그랬죠.
             교육에 승부수를 띄운 성격을 띄고 있었
             어.
             심훈_ 일반 회원들은 교육에 희망을 이라
             는 영역에 대해 생소하고 위험부담을 느           심훈_ 문장으로서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 못했었는데, 한번에 들어오지 못해서 마음
             끼고 있었어요. 회원들 사이에서 염려와           요해요. 문장이 명확하지 않으면 조직이           에 부담이 점점 커졌어요. 힘이 들었지만
             함께 왜 해야 하는지 각종 질문들이 쏟아          흐지부지 되기 쉬워요. 선언문 조직도 등          꿈을 말한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구
             졌어요.(돈이 충분치 않다, 능력과 인프라         이 문구로 정리 되면서 너무 선명하게 되          나라는 생각이 정말 강해지면서 이렇게 이
             가 부족하다 등) 그러는 중에 2003년 경        어 갔어. 그래서 기뻤어요.                 자리에 오게 되었어. 결국 꿈을 꾼 방향으
             에 양육이 약화된다는 의견이 있었죠. 그                                          로 흘러감을 보게 되었어요. 놀랍고 신기
             래서 2006년 경 집중훈련 얘기로 양육의         박현수_ 가고자 하는 방향에 촛점을 맞           한 느낌이죠. 또, 놀라운 건 성령의 바람이
             체계화 얘기가 나왔어요. 또, 2000중반대        춰 정리되고 영역들이 정리 된 부분에 감          불어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꿈을 말해
             한동대가 생기며 그 대학원으로 많이 갔           사해요. 비전2020보고서에 많은 애착이          도…결국 성령의 바람이 불어 올때 사람들
             어. 우리 여럿이 기독교세계관 등 기독교          가요. 오래도록 개인적으로 생각해왔던 내 의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어져. 때가 되면.
             대학에서 배운 것들의 영향이 커졌어요.           용. 또 부담이 많이 됐어요. 발표한 사람         함께 볼 수 있음에 축복이 아닌가 생각이
             박현수 교장선생님도 당시 고신대에서 배           외에는 관심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되요.
             우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점점 커져갔어          사람들이 당장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
             요. 그러다가 2008년 경 정간사회의 만장        심을 덜 가져서. 어떻게 추진할지 고민하          함재희_ 아이고 너무 고생들 하셨어요(잠
             일치가 나왔고. 2007년 경 마을을 찾아봤        고 설득하고 노력해왔어. 부담감으로. 5만 시 말을 잊지 못함) 한동안 저는 나와 상
             어. 저는 그 2002년 비전선포식에서 사회        평을 사서 학교를 하겠다고 발표하기도했 관 없는 일처럼 되어졌었어요. 육아 및 생
             를 맡았어요. 발표 하던게 생각이 나요. 돌        어요. 2007년 미국에 다녀와서 사표를 쓰 황의 모습으로 말이죠. 그런데 돌아보니
             아보니, 비전에 공감하기에는 시간이 걸리          겠다고 하고 이일을 하겠다고 했는데. 정          달라요. 저에게는 요즘 당연시 되는 생각
             는 걸 많이 느꼈어요. 사실 많이 지치기도         간사회에서 보류를 해서 따르고. 홍세기           이 있어요. 그건 바로, “교실의 교육이 양
             했어요.                            간사님께 학교 설립을 부탁하고 했다가            육과 같아야 한다.” 홍세기 선교사님의 이
                                             중간에 선교를 나가셔서. 결국 제가 결자          야기로 기억하는데, “교육을 잘 하면 양육
             심훈_ 당시 저는 U3 준비도 하면서 중훈         해지의 마음으로 학교세우는데 나서게 되 이 되고 양육을 잘 하면 교육이 된다.” 그
             선생님과 기획하고 제명선생님과 진행하            었어요. 10여년간의 마음의 부담을 가지          당시에는 서로 별개라고 생각을 했고 그
             고 했었어요. 그런게 많이 생각나요.            고 기도하고 길을 찾게 하셨어요. 생각지          뜻을 잘 몰랐는데,’ 이제는 그 두 가지가
                                             못했지만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다고 돌 하나가 되기를 원하며 고민하며 현재 생활
             박현수_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세계관            아보게 되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어           하고 있어. 비전2020의 큰 흐름 가운데서
             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2000년대 부산        요. 결자해지(웃음)                     낙숫물과 같이 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수련회 등에서 홍세기 간사님을 비롯한                                            동안 고생하신 선배님 감사하고 존경합니
             몇 분은 개인적으로 학교를 세우자는 얘           심훈_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교회부흥전 다.
             기 등 여러 소수 의견이 제안되어 왔었어.         략에 관한 책을 보며 SK가 원래 정유화학
             저도 개인적으로 이런 걸 제안해 왔고.           기업인데 통신회사로 바뀌며 통신업계의 1 심훈_ 놀라운 사실이 뭐냐하면, 당시 이
             말이 아닌 보고서를 내달라는 부탁이 왔           위 기업이 되면서 전혀다른 위상을 가졌음 를 추진하신 박현수 간사님의 나이가 30
             어요.                             을 알려주셨는데, 기억에 많이 남았어. 시         대 후반였어요. 그 때 우리는 굉장히 젋었
             그 당시는 양육의 한계와 무너지는 교육           대의 흐름을 보고 바뀌어야 하는 걸 알아          다는 거에요. 40대가 아니었다는 걸 느껴
             계에 대한 염려가 나오고 있었어. 당시 제         채는 회사는 달라진다는 거. 선교회도 마          야 합니다.(웃음) 저는 그런 때에 하나님
             생각에는 개인양육에서 사회양육으로 나            찬가지로 회원과 영역의 변화의 조짐과 요 이 부르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준비되어
             아가야 한다라고 생각했어요. 교육을 통           구가 많아졌어요. 그러나 생각이 잘 바뀌          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꿈을 꿔야하는
             해 사람을 전도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선         지 않았어. 전 답답함을 많이 느꼈어요. 그 나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의 길에 대해 제안하고자 하는 생각           런데 위원들이 모이면 공감대를 가진 이들 선배들 있다고 그냥 믿고 어떻게 되겠지
             을 하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 하는 위원들          끼리 모여서 꿈을 나누며 마음이 시원해지 하는 생각은 안되요.(웃음) 지금도 느끼는
             을 만나면서 보고서를 만들 수 있었어요.          고 즐거웠었어요. 다른데서 하기 힘들 얘          게 뭐냐하면, 교육환경이 시시때때로 바뀌
             정말 뿌듯했어요. 그 마지막 해단식을 좀          길 하면서 해방구처럼 느껴졌어요. 서로           고 있다는 거에요. 여기에 대해 누군가 대
             무리를 한 괜찮은 송도의  음식점에서 했          해보자 해보자했죠. 결국은 그 얘기를 한  비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넘어질
             는데, 너무 감사하고 뿌듯해었어. 정말 그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걸 나이가 더 들면                 수 있어요. 항상 우리 공동체는 누군가는
             때 대부분은 자비량으로 했었죠. 지원 받          서 깨닫게 되었어요. 누가 해야 하는지 생 대비하고 꿈을 꿔야해요. 다시 20년뒤를
             은 건 하나도 없었지만 감사하게 했었어           각하다 꿈을 꾼 사람들의 책임임을 느꼈           생각하면서요. 누군가에게 꿈을 주실거에
             요.                              어. 별무리학교도 첫 시작에는 들어오지           요. 누군가는 꿈을 꿔야해요.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