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1>
선교 매트릭스, 이영 선교사
1. 선교적 교회
선교적 교회의 개념은 인도 선교사 출신 영국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James E. Lesslie Newbigin)에 의해 시작됐다.
1988년 미국의 선교학자 벤 겔더(Van Gelder) ‘선교적 교회’ 라는 책을 출판하며 대중화됨. ‘교회의 본질은 선교’라는 것.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며며, 선교가 교회보다 우선된다. 선교는 교회에서 단순한 활동이 아닌 교회의 본질이고 목적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이 세상으로 흩어져 삶의 자리에서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성도들은 각자가 서 있는 곳에서 선교사처럼 살아가는 것.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직장에서 선한 행실로 사는 것. 교인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 있는 자리에서 선교사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에 모이는 것보다는 세상으로 흩어짐을 강조한다. 교회에서 봉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또한 중요시한다. 그러기에 선교적 교회는 해외 선교에 대한 강조는 줄어든다.
2. 선교사님이 말하는 선교적 교회의 특징 5가지
1) 선교적 교회는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2) 교회의 존재성 또한 선교적 본질에 초점을 둔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사아에 보냄을 받아 그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를 성취해 가는 선교적 존재로 인식함.
3) 하나님 나라 확장에 초점을 둔다. 선교적 역동성을 회복시켜 준다.
4) 통합적이고 통전적인 사고를 하는 교회이다. 복음과 구원의 통합성을 인식하고 복음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5) 교회의 선교방식은 성육신적이다. 낮아지고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고 희생하신 예수님의 방식이다.
3. 교회와 선교
선교의 책임과 사명은 선교사 개인 이전에 교회 공동체에 주셨다.
교회는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선교한다. 파송 또는 협력해서 선교사를 보낸다.
2) 파송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한다. 영적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돌봄. 재정적인 도움. 재교육과 가정의 돌봄. 등 전 영역에 필요한 돌봄을 행함. (영, 정서, 신체, 대인관계, 가정, 지적 부분 등)
3) 선교단체와의 좋은 관계을 맺어야 한다. 큰 그림은 교회의 정책과 비전에 따라서 하되 전문적인 부분에서는 선교단체가 독립적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위임 및 위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파송한 선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여 지나친 간섭보다는 사역을 평가해주고 도와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4)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선교사라는 의식을 갖고, 지금 있는 곳에서 선교에 직접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4. 교회의 선교 실제
한국 교회의 선교는 담임 목사의 영향이 크다. 담임목사의 선교비전 회복이 가장 시급하다.
교회의 선교부(선교위원회)가 독립된 기관으로 운영되는 것이 필요함.
1) 선교 여행을 준비함. (필드 리서치 훈련: 현지인들에 대해 배우는 것)
2) 선교 학교 진행: 선교 단체의 도움, 선교사 초청 등
3) 정기적 선교 기도 모임 운영
4) 선교사를 도울 전략 수립
5. 한국교회 선교의 위기와 극복
‘남은 자’ 사상: 하나님께서 ‘남은 자’, 즉 연약한 자, 숨어 있는 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 그러나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자,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눈에는 주목을 받는 자다.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의 위기 상황 가운데, 극복할 방법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다.
6. 섬김의 선교
대학 2학년때 선교사로 헌신한 어느 선교사의 고백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했고 성도들에게 많은 섬김을 받았다. 교회의 성도들이 정성껏 차린 음식과 새벽 예배 후 성도들이 집에다 갖다 놓는 과일, 고기와 성도들이 교회 청소도 못하게 하는 등 이런 섬김을 받던 중 권사님들이 점심을 어떻게 드시는 지 궁금해서 따라 갔는데 권사님이 라면을 끓여 먹고 계시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고 섬기리려 오신 예수님이 생각났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 있으면 계속 이렇게 섬김을 받겠구나 생각이 들어 대학때 선교사로 헌신했던 고백이 생각나면서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지에서 현지 목사님들과 현지인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면서 섬김의 기쁨을 누리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섬김은 노동이나 손해가 아닌, 기쁨이고 영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 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참다운 행복이라는 것을 선교지에서 경험하면서 누렸다는 고백이었다.
섬김, 그것은 기독교의 아주 핵심 덕목이다. 섬김의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섬김을 통해 복음이 복음다워진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주께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섬기는 섬김이야 말로 참으로 가치있는 섬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발을 직접 씻기 셨다. 당시 발을 씻는 것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섬김은 겸손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겸손을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다.
교회는, 제자는 하는 일에 초점을 맞는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선교 매트릭스를 읽기 전에는 선교적 교회하면 선교에 대해 매우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교회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선교적 교회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그 기원을 살펴보면서 선교에 대한 개념이 삶과 연관되면서 오히려 열방의 민족들을 향한 선교의 중요한 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선교사적 삶도 매우 중요하지만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삶도 매우 중요함을 인식하게 됐다.
섬김이라는 단어는 희생과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기쁨이자 영광이라는 생각이 먼저 내 내면에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섬김으로 복음의 복음 다워질 수 있음을,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길이 열렸듯이 우리들의 섬김으로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과제2>
복음에 미치다, 이용남
우리나라는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채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까? 우리 민족이 에수님의 자녀가 되는 꿈같은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같이 기쁨을 누리고 살게 되었을까? 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을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온 사람은 누구일까? 말도 통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130년 전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목숨을 걸고 이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결코 우리 민족 스스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복음을 누리는 것이 엄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하나님을 믿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안전지대를 떠나라
“1592년 임지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는데 천국에 갔나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천국에 갔나요? 지옥에 갔나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까?
그 학생에게 답을 주기 전에 “그때는 우리 민족에게 선교사님이 오시지 않았단다.”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늦게 들어온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고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복음이 왜 이렇게 더디게 전파된 것일까?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미전도 종족이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 이유는 성경과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라는 주님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이 명령을 ‘지상 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위임 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셨다. 오순절 제자들에은 성령으로 충만했다. 권능의 역사가 나타났다. 3천 명, 5천 명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안주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교회를 흩으셨다.
복음이 세계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지 못하는 첫 번째 장벽은 그리스도인들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지 못하고 안주하기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떠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거했을때 이방 사람들이 빛을 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간증을 듣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선교학에서는 스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선교를 ‘자발적인 선교’라고 말하고, 어쩔 수 없이 슽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을 ‘비자발적인 선교’라고 말한다. 비자발적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며서 생기는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전지대는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면 주님은 핍박을 통해서라도 흩어지게 하셨고, 잡혀가서라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마인드 장벽, 요나 증후군
당시 제자들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영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에서만,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그들은 멀리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흩어졌다.
구약의 선민의식의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요나 선지자를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를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요나가 펄쩍 펄쩍 뛰며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따졌다. 요나는 참 선지자였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사랑하고 계실지라도 자신은 그 백성이 싫었다. 요나는 이방인을 개, 돼지보다 못하게 여기는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뒤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는 앗수르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이 통혼으로 피가 섞이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자기 백성이었던 사마리안인들도 그렇게 무시했는데 하물며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대했을까?
장벽을 넘어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을 이방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생각을 바꿔 주시려고 이방인 고넬료와 유대인 베드로를 만나게 해주셨다. 바로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이다.
고넬료는 이방인인데다가 자신을 식민통치하고 있는 로마 총독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고넬료를 통해서 베드로 사도의 생각을 바꿔주셨고, 하나님이 이방인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의 전환 유대인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일어났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놀라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영향이 우리에게까지 미쳐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의 전환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에는 확장성이 있다. 나 혼자만의 복음이 아닌, 유대인만의 복음이 안ㄴ 모든 민족의 복음인 것이다.
TMTC선교 훈련이 우리 선교회에 이런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너무나도 귀한 과정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주님의 지상명령,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그 사명으로의 초대에 더 많은 선교회의 선생님들이 반응하고 선교 동역자로 세워지기를 소망해본다.